한 낮의 햇살은 하늘을 밀어올리고,
초저녁 달은 별빛을 쓸어 내렸는가?
풀벌레 울음마저도, 잠재워 버린 태고의 적막,
산장의 창마다 불이 커지고 명월에 숨죽이는 가녀린 외등,
푸르러 쏟아지는 달빛,
늑골 아래 두근이는 가슴,
밤 이슬 내려 앉아 한방울 뜨거운 그리움으로 승화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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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한해에 두 어번, 유별스레이 찾아드는 그리움이 있다.
산화경방이 끝나고, 유록의 잎사귀들이 푸르름을 더해갈 때,
짙은 녹음의 산릉위로, 치친 계절이 한숨을 토할 때.
그 날도 지난 해의 그맘 때 였다.

음력 9월하고, 열 이틀.
채 풀리지 않은 대간길의 피로를 안고, 지리 종주길에 동승했다.
맘닮은 여인네들.
지리로 향하는 가을날의 아침은, 햇살이 맑고 눈부셨고,
더 깊은 계절을 기다리는, 성삼재의 아침은 한산하고 조용했다.
평소의 산행때처럼, 여인네들의 행동을 재빨랐다.
대간의 여정이 풀리지 않은 나의 몸둥인, 배낭의 무게와 함께 어깨를 짓눌렀고,
바삐 달려가는, 여인네들의 꽁지는 보이지 않았다.
울타리를 넘어가는 지름길이 눈안에 들었지만, 큰 길을 올랐다.

지난 공휴일, 수 만명의 사람들이 다녀 갔다는 지리,
주능은 평일이어서 그런지, 의외로 한산했다.
20여분 땀을 쏟은 몸은 조금 가벼워졌고, 발걸음도 안정을 찾은 것 같았다.
수분을 빼앗긴 나뭇닢들이 떨어지고 있었고,
나무에 달린 잎들도, 땅으로 돌아 갈 채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단풍이라기 보단, 너무나 지쳐버린 목마름 이었다.
한자락, 가을비리도 내려 주었으면 하는, 애탄 바램.

멀찌기서 다가오는, 남부의 능선들은 가을빛이었으나,
새로운 계절의 귀로에 선, 중년의 가슴은 서글픔 이었다.
11시를 지나는 시간, 나의 발걸음은 멧돼지가 많다는, 돼지령에 서 있었다.
따글따글한 갈 햇살은 바람을 잠재웠고, 몸엔 여름날 못잖은 땀을 송글이게 했다.

그 흔하든 야생화들도, 씨를 맺어 이미 한 해를 마무리하고 있었고,
가끔씩, 보라색 투구꽃과 용담이, 마지막 가을 얘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시원스런 이정표!
피아골 삼거리, 그리운 삼홍소 피아골 가을은, 얼만큼 내려서고 있는지?
발걸음은 임걸령으로 향하고 있었으나, 마음은 피아골의 가을을 향해 줄달음쳤다.
갈 길은 먼데, 조그만 오르막도 몸은 상당이 힘겨웠다.
배낭의 무게는 어깨를 누르고, 허리를 거쳐 종아리, 발꿈치로 이어졌고, 선두는 보이지 않았다.
하늘이 숭숭보이는 나무 아래 바위에, 배낭을 걸치고 앉아 멍히 하늘을 보았다.
야위어진 잎새들을 어루만지며, 길 위로 햇살이 쏟아져 내리고, 나는 눈부심에, 눈을 감았다.
휴식의 나래위로 쏟아져 내리는 행복함.
더 많은, 시간의 여유를 갖지 못함이 못내 아쉽지만, 발걸음을 옮긴다.

임걸령 샘터,
모두가 쉬어가고픈 자리,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든 여승 한 분과, 그 일행들을 만난다.
단촐한 차림. 여유롭고 편안한 모습, 큰 덩치의 배낭을 보며,
격려하는, 뽀얀 얼굴에 단아한 미소가 너무나 청순타.
그 모습을 돋보이기라도 하듯, 어디선가 들려오는 말고 카랑한 새소리.
목을 축이고, 또 길을 간다.

12시 30분 노루목. 여유론 휴식을 갖는다,
간식으로 만들어 와 내미는, 어떤님의 샌드위치가 참, 맛있다.
직접 만든 매실잼의 새콤달콤한 맛이, 피로를 걷고 새로운 힘을 싣는다.
그렇지만, 또 이내 힘겨운 발걸음. 오늘따라 유달리 멀게만 느껴지는 벽소령.
당일 종주의 그 힘찬 발걸음을, 한번 만이라도 느낄 수 없으련지?

삼도봉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토끼봉으로 향하는데,
무심코 돌아 본, 반야봉의 중턱에,오두마니 낯익은 양철지붕 하나.
"묘향암." 사진으로만 봤을 뿐,
이 길에서 묘향암을 보긴 첨이다. 얼마나 바삐 서둘렀슴일까?
앞으로 가야 할 길 보다, 마음은 또 자꾸만 묘향대로 향한다.
토끼봉을 지나니, 반야봉은 멀어지고, 천왕봉이 다가 선다.
그리운 이의 드넓은 가슴팍, 제석봉도 함께.

오후 4시, 연하천이다.
아늑한 산장의 뜨락으로, 오후의 햇살이 바쁜 손끝을 추스리고,
산장 뒤 나뭇가지엔, 저녁을 서두르는 산까마귀들의, 날개짓이 부산타.
마당엔 삼삼오오, 여유론 사람들의 모습.
언제나 맑게 쏟아지는 시원스런 약수가, 갈 햇살만큼 맑고 깨끗하다.
시원한 맥주한 캔으로 목을 축이고, 저녁쌀도 불려서 벽소령으로 향한다.
너무 많은 인파로 인하여, 물이 귀하다는 벽소령 물소식에 ,
물병 두 어개를 채워 올리고 보니, 지친 발걸음이 더욱 더 무거웁다.
벽소명월에 눈 먼, 미련한 아낙은 이제, 짖누르는 허리의 통증도 잊어버렸나 보다.

5시 30분. 예정대로 벽소령에 도착이다.
분주한 산장, 대원사에서 출발하신 선생님께선, 벌써 이른 저녁을 드시고 계시고,
음정으로 올라 온, 왕대장은 캔맥 한 상자를 풀어 놓고, 우릴 기다린다.
이렇게 반갑고, 고마울 수가,
사람보다 맥주에 눈길이 쏠려, 배낭을 내리기가 무섭게, 목부터 축인다.
찌리리한 알콜의 전율이, 몸을 타고 내리며 하루의 피로를 몰아 내리는것 같다.

각 조별로 여인네들의 손발이 분주하고,
어깨품 아깝지 않은 족발파티에, 심상찮은 벽소명월의 기운이 감돈다.
깊숙이 감춰두었든 갖가지 과일주들이, 밥상에 오르고,
행복한 여인네들의 얼굴이 붉그레 가을단풍이 된다.
밥보다 먼저 술잔에 눈이 가고, 땅거미 짙은 벽소령의 뜨락으로,
가만가만 숨죽이며, 뽀얀 상현달이 떠 오른다.
산장엔 불이 꺼지고, 달빛은 고요히 벽소령을 안고 흐르는데,
취기 어린, 여인네들의 잔 위에도 달이 차고,
잠 못드는 가슴은, 달빛 아래 흐느낀다.
얼마다 꿈꾸었든 벽소명월인가?
텅빈 취사장엔 따끈한 당귀차가, 마지막 그리움 데우고,
까닭없이 서글픈 가슴은, 새벽을 맞는다.

새벽 5시, 달빛은 으스러지고, 총총한 별들이 하늘을 덮었다.
조심조심 풀벨레들의 단잠을 다독이며, 이슬을 걷어가는 인별들이 움직인다.
중년의 잊음. 스틱을 챙기러 되돌아 갔다 오는 여인. 모자를 찾으러 달려갔다 온 나.
새벽부터 무슨 힘몰이, 다리에 힘이 빠진다.
덕평봉.
앞으로 붉그스레 동트는 하늘이 보이고, 랜턴을 꺼도 될 만큼 주위가 밝아졌다.
몇 걸음 더 옮겨, 붉어진 동녘을 바라보며, 선비샘에서 목을 축인다. 작년 이맘 때,
혼자 비박을 하든 그 젊은이는 어디서 무얼할까? 문득 생각이 난다.

세석으로 향하는 가파른 오르막 계단. 또 새로이 생겨 난 계단이다.
누가 지은 이름일까? "죽음의 계단"이라고, 법계사의 가파른 계단이 안락로 였는데,
이 계단을 죽음의 계단이라 이름한 사람은, 얼마나 큰 고통의 계단 이었을까?
달리든 날의 느낌이라면, 그럴 듯도 하다. 계단의 첫 쉼터에 앉아 숨길을 고르며
눈길 닿는 곳을 보니, 지나간 사람들의 흔적이 빼곡하다.
나도 몰래 엉뚱한 낙서 한점을 슬쩍하고, 다시 계단을 오르는데,
무어냐며 짖궂게 채근하는 안개님의 물음에, 킥킥거리며 진땀을 쏟는다.

칠선봉에 올라 아침햇살을 받고, 이곳저곳 기웃거려 추억도 새겨본다.
빛나는 햇살의 힘이련가? 꾸역꾸역 힘겨운 발걸음은 영신봉에 오른다.
촛대봉위로 쑤욱 해가 쏟았고, 넓은 세석의 평전위로 가을빛이 쏟아진다.
세석에서 늦은 아침을 먹고, 점심을 챙겨 담고 장터목으로 향하는데,
그렇게 무성든 여름날의 야생화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얼레지가 보고 싶다.

평전길 오르막이 여유롭고, 촛대봉의 시원스런 조망은 가슴을 쓸어 내린다.
연하봉에서 둘러보는 주변은, 온통 짙은 가을색이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완연한 가을속으로 접어드는 느낌이다.
갓 시집온 새색시볼의 부끄럼처럼.......
장터목에서 마지막 에너지를 충전시키고, 제석봉을 오른다.
오가는 사람들의 반가운 인사가 정겹고, 말없어도 다정스런 미소가 아름답다.
이런 꿈같은 행복들이, 나의 내년을 기다려 줄까? 늘 묻어나는 애잔함.

화창한 정상의 날씨,
수많은 사람들, 쏟아지는 햇살, 높푸른 가을하늘, 표지석에 가벼운 포옹을 한다.
얼굴에 와 닿는, 싸아한 느낌.
그대로 간직 한 채, 중봉으로 향한다. 써리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에, 단풍이 불붙는다.
"가을의 오르가즘" ,그 어떤 표현도 떠 오르지 않는다.
홍안으로 물드는 여인네들의 모습이, 원숙한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중산리로 하산하지 않음을 모두, 고마이 여긴다.
주능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을 길이다. 쉬이 발길과 눈길을 떼지 못한다.
어느핸가 단둘이 느꼈었든, 가을의 지리종주가 추억으로 새롭다.

"치밭목." 내집 같은 느낌이다.
산장지기 아저씨 낯설지 않아 그렇고, 언제나 정겨운 녀석들 반가워도 그렇다.
캔맥 한 잔과 원두 한 잔의 맛이, 기우는 햇살만큼, 끝나가는 일정만큼, 짠하고 아쉬웁다.
무재치기 폭포위에서, 마지막 수다와 간식으로 몸을 추스르고,
산그림자 길어 바쁜 발걸음은, 새재로 향한다.
이제는 모두가 지쳐 버렸을까? 수다로 깔깔이든 입들은 모두가 침묵이다.
뚜벅뚜벅 지친 발걸음, 산그림자는 어둠을 몰고, 산죽밭을 내려와 ,
갈 길을 막는데 지친이는 발걸음 후들이고, 아쉬운이는 마음걸음 후들인다.

인적드문 조개골, 낯선이들의 인기척에 개들만이 울부짖고,
산장의 외등은, 조용이 마을을 지킨다.
마음고운 이의 배려, 몸은 짐짝이 되어 화물차 짐칸에 내 뒹굴어 지고,
지친다리는 경련을 일으키며, 더 큰 고통을 부르는데,
대원사 계곡의 밤공기를 가르며, 쏜살같이 주차장으로 향하는 화물차,
벽소명월보다 더 큰, 열나흘 보름달이,
환한 웃음으로 우리들의 쓸쓸한 마지막 발길을 다독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