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워지지 않는 빈자리(지리산)
추질거리던 장마비 사이로 잠시 햇살이 비추이고 있었다.
두 식구를 내 보내고 밀폐용기에 누룽지 몇 조각을 부스러 넣고,
적당량의 더운 물을 부었다.
그리고 짭조름이 담궈진 장아찌 몇 알.
뒷 베란다에 힘없이 수그린 배낭을 끌고 나와 대충의 짐을 챙겼다.
그리고,머리를 질끈 동여메고, 모자를 푹 눌러 꽤재재한 얼굴을 가린 채 집을 나섰다.
차 시간으로 맘이 바빴었기에,
새벽에 문자를 보낸 산안개님은 출발을 할 시간까지 소식이 없었다.
문자 확인을 하지 못했을까?
혼자라도 괜찮았다.
휴가와 대간, 장마에 밀려 먼 그리움길이 되어버린 지리는,
혼자만의 감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으므로......
7시50분으로 알고 나선 봉곡동 정류장의 버스 시간은 8시였다.
30여분의 기다림은 조금 지겨웠다.
겨울날엔 휑그르르 차거운 바람만이 지나치든 정류장,
여름의 끝자락이지만 높은 지붕 아래로 비춰드는 햇살이 피하고 싶지 않았다.
여름열기가 한풀 꺾였음일까? 그런것 같지는 않은데....
참 오랜만에 이 자리에 서 있는 것 같았다.
8시 15분.
버스엔 꽤 많은 사람들이 타 있었다.
벌초를 하러 가는 사람들, 산행을 가는 사람들, 개학을 한 학생들.
구석자리로 배낭을 끌고 들어가 어수선한 매무새를 고치며, 창밖을 내다 보았다.
연일 비에 씻기운 국도변의 산야는 말간 가을햇살 만큼이나 깔끔했다.
벼들은 모두 이삭들을 피웠고, 빗속에 지친 짧은 여름은
더 이상 머무를 곳이 없다는 듯, 산릉위에서 여름의 지친 한숨을 토하고 있었다.
힘겨운 매미 울음, 하나, 둘 하늘거리는 도로가의 코스모스,
피어나는 으악새, 알을 여물키우는 논 밭의 곡식들,
다듬어져 가는 초가을의 서정은 맑고 푸른하늘 만큼이나 마음을 시렵게 했다.
9시15분 중산리.
천왕봉은 비에 씻겨 깔끔한 매무새로 앉아 있었고,
매표소로 향하는 지름길은 여름 내내 키를 키운 잡풀들이 휘어져 길을 막고 있었다.
슈퍼에 들러 필름한 통을 샀다.
혼자 오는 날, 쓰잘데 없는 사진을 찍는 것은 내 버릇이다.
어설픈 찍사의 허접스런 사진들은 집안 구석구석 널부러져,
가끔씩은 옆지기의 구박을 받기도 하지만, 필름을 맡기고
사진을 찾으러 가는 길은 산행 못잖은 또 하나의 혼자만의 기쁨이기도 하다.
초입은 등산로라기 보단 물길이다.
혀 끝에 하얀 밥알 두 개를 단 며느리 밥풀꽃이
까치발하며 피어나고 사방으로 물소리가 요란하다.
평일이지만 사람들이 제법이다.
산악훈련을 나왔다는 송충이 하나의 안스런 군인들
법계사까지만 행군을 한다는데, 씩씩함 보단 짠함 맘이 앞서 앤시럽다.
안타까운 모습을 뒤로하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 법계사에 다다르니,
어린 두 딸을 다독이며 계단을 오르는 새댁이 있다.
아랫마을에서 올라 왔다는 젊은 새댁.
바위사이에 피어난 산수국을 들여다보며 꽃보다 더 예쁜,
두 딸래에게 야생화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지만, 혼자만이 꽃속에 도취되었고,
두 아인 나무계단의 줄을 붙들고 장난이 한창이다.
법계사를 지나 전망 좋은 바위에 올라서니,
점점이 드리워진 흰구름 아래로 내가 사는 작은 도시가 보이고 ,
햇살에 비추인 물길이 또렷이 다가온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행복감.
다시 재촉되는 발걸음은 법계사 뒤 가파른 산허리를 올라
정상이 마주 보이는 능선위에 선다.
푸른하늘 흰구름과 어우러진 깔끔스런 정상은 첨 모습그대로이다.
순두류로 흘러가는 계곡의 물소리가 솔숲을 뚫는 바람소리처럼
시원스레이 들려오고, 아직 짝짓지 못한 매미의 구애가
이 높은 산자락 언저리에서 구역구역 슬픈 울음을 토한다.
짧은 철계단을 올라서면 또 한번 남해를 조망 할 수 있다.
그리고 많은 야생화를 볼 수 있다. 구절초, 용담, 산오이풀,....
오늘은 여러부류의 사람들을 만나는 것 같다.
장애우들,
정상을 다녀오는 모습들이 너무도 천진스럽고 밝아 보여
마음이 뿌듯해지고 도우미로 나선 젊은 친구들이 고맙기만 하다.
그리고 개선문을 올라서니 조잘조잘 무리지어 오르는 초등학생들을 만난다.
지리자락 꾼들이 많은 곳, 순천서 왔다는 두 학교의 학생들이다.
중년의 쯤의 나이로 보이는 인솔 교사들의 모습이 존경스러워 보인다.
햇살이 뜨거운 시간 천왕샘.
연일 내린 비 때문인지 천왕샘의 물이 넘쳐 흐른다.
한 국자 가득 떠 들이키니, 오랜 장마속에 묵혔던 스트레스가 싹 걷혀 가는 것만 같다.
쪼무래기 아이들의 재잴거림속에 힘든 줄 모르고 오르는 마지막 가파른 오르막.
절로 함성이 터지는 정상!
참 복받은 행운의 하루다.
여기저기 셧터의 움직임이 부산하고, 밝은 햇살만큼이나 아이들의 함성이 밝다.
사방으로 확 트인 조망, 하늘가에 흩어진 갖가지 구름 떼들,
평화롭고 한가한 축복의 정상이다.
가슴으로 안고 내려서기엔 너무나 아쉬운 발길.
몇장의 추억을 새기고,
장터목으로 떨어지지 않으려는 발걸음을 옮긴다.
천천히,..........아주 천천히.
정상에서 장터목으로 가는 길엔 야생화가 많은 구간이다.
동자꽃, 돌쩌귀, 용담, 산오이풀, 하늘빛 닮은 그리움의 야생화들이 줄줄이 피어난다.
동자꽃만을 골라 나래를 펴고 깃드는 보랏빛 나비.
꽃의 전설만큼이나 슬픈 사연이 있을 것 같아,
카메라를 들고 마주해 보지만 잘 잡혀지질 않는다.
언제나 가장 편안한 안식이 느껴지는 곳, 제석봉.
사계의 어느 싯점에 지나쳐도 예외일 수 없는 곳.
내 산행기 책갈피에 가장 많이 꽂혀진 추억 사진,
한번도 예외일 수 없는 마음의 보금자리.
여기 저기 그리운 가슴으로 셔터를 눌러 보고,
가슴 그득 안겨오는 주능을 품어도 보고,
먼 덕유의 산자락도 품어 보고. 눈 감고 큰 숨 한번 들이켜 보고,
하늘 향해 빈 손을 휘저어도 본다.
행복한 가슴으로 내려서는 장터목 산장.
몸은 지치지만 따뜻한 가슴들이 머무르는 곳.
산장 벤취에서 혼자 먹는 누룽지 한사발의 점심.
후식으로 깨물어 보는 햇 사과 한 조각,
나누는 정이 흐뭇하고 느껴지는 맛이 상큼하다.
내려서는 하산길,
산장아래 돌계단 물기사이로 노란물봉선 예쁘고,
골골이 흘러내리는 작은 물소리 함께 새첩다.
유암폭포 변함 없고, 폭포옆 다래나무엔 줄줄이 푸른열매 가을이 멀지 않다.
홈바위교 건너서 내려서는 너덜 길.
오늘도 어김없이 눈인사 하는 앙증맞은 도마뱀.
마흔다섯 중년 철제계단 두 개를 지나고, 산죽사이 밥풀꽃 배웅 받으며
칼바위 내려서니, 하늘은 조금씩 구름을 드리우고 햇살은 꺽이어 빛을 잃는다.
또 내일의 비 뿌림을 준비하려는 걸까?
인적이 끊어지는 한적한 길, 발걸음은 집으로 향하는데,
마음은 자꾸만 뒷걸음질쳐 오든 길을 되돌아간다.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빈자리. 지리사랑 역마살은 언제쯤 멈추일까?
쓸쓸한 계절은 가까이로 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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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박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여정(대간14구간) 
[re] 설악산 십이선녀탕 계곡 및 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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